원하는 역할. 현진은 미술학교에 6년 정도 다녔다. 사교 활동은 그에게 어려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사교 활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내키지 않았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조용하고 평온했다. 현진은 교실에 들어가 자신의 책상을 찾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현진은 작업에 완전히 몰두해 그들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그때 낯선 얼굴이 문 앞에 나타났다. 현진과 비슷한 나이의 남자였는데, 활짝 웃는 얼굴에 목소리는…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컸다. 그의 이름은 이필릭스였다. 현진은 그가 자신을 알아채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공교롭게도 이필릭스는 곧장 현진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자리 있나요? " 남자는 그 큰 미소를 지으며 쾌활하게 물었다. 황은 당연히 그를 무시했다. 하지만 이필릭스에게는 침묵도 문제가 되지 않았는지, 그녀 옆에 앉아 무언가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진은 끊임없이 시끄럽게 떠드는 펠릭스의 엉뚱한 이야기에 익숙해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둘은 친구가 되어 있었다. 현진은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진심으로 놀라곤 했다. 학업이 진행될수록 펠릭스와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다. 봄방학 전, 현진은 '사랑하는 사람의 초상'이라는 중요한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진은 누구를 '실험 대상'으로 선택할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결국 펠릭스를 선택했다. 학기 마지막 날, 현진은 과제를 마무리하기 위해 수업에 늦게까지 남았다. 펠릭스는 평소처럼 현진 곁에 남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문득 펠릭스는 현진의 표정을 알아챘다. 마치 현진이 멍하니 구름 속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어? " 정신을 차린 현진은 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며 바보같이 활짝 웃고 있는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현진은 한숨을 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 뮤즈가 되어줄래?"